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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환영 - E. H. 곰브리치 지음 / 차미례 옮김

1.  유사성의 한계

1장 유사성의 한계는 두 가지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단락은 빛으로부터 물감이라는 제목이고 두번째 단락은 진실과 전형이라는 단락입니다.

 

첫번째 단락에서는 빛으로부터 물감으로 매개전환이 일어날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유사성의 한계와 그것을 받아들인 한 낭만주의 화가를 중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두번째 단락에서는 저자는 우리가 바라보는 진실은 모두 결국 전형과 기법의 통제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러 사례를 보여주며 유사성의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Section 1.  빛으로부터 물감으로, From Light Into Paint

저자는 55페이지 빛으로부터 물감으로 단락제목 밑에 현재의 스위스, 과거 제네바 공화국 출신의 파스텔 화가 장 에티엔느 리오타르가 한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그림은 가장 놀라운 무당이다. 이 무당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명백한 허위를 순수한 '진실' 그 자체인 것처럼 믿도록 설득할 수가 있다."

이 인용구가 말하듯 빛으로부터 물감으로 단락에서는 가장 진실되게 그려진 그림조차 허위라는것을 이야기한다.

 

존 컨스터블 (John Constable)은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로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이성을 변화하는것으로 수정하여 개성을 강조하고 유연한 사고를 이끌어낸 화가중 한 명이다.

 

컨스터블은 평생 그가 태어난 서폭(Suffolk)의 풍경화만 그렸는데 당대 낭만주의의 대가이자 후에 프랑스 인상주의에 영향을 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와는 달리 비비드하고 추상적이고 화려한 빛을 표현하지 않고 어찌보면 낭만주의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사실적이고 성실한 풍경화를 그렸다. 또한 어찌보면 빛을 방해한다고도 볼 수 있는 구름을 잘 표현하여 구름화가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저자가 빛으로부터 물감으로 매개가 전환할때 생기는 필연적인 유사성의 한계를 주장하기 위해 컨스터블을 고른 이유는 오히려 그가 사실적이고 성실한 화가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진실되어 보이는 그림조차도 결국은 허위라는 장 에티엔느 리오타르의 인용과 가장 잘 이어진다.

 

컨스터블은 터너가 이른나이에 영국 왕립미술원의 회원이되어 성공한것과는 달리 굉장히 늦은나이에 회원이 됐으나 얼마 지나지나 않아 병으로 고생하다 명을 달리했다. 그런 그가 처음 인정을 받은것도 영국에서가 아닌 프랑스에서 전시한 "건초 마차"라는 작품 덕분이다. 프랑스의 화가들이 "건초 마차"안에서 싱그럽다는 느낌을 여러가지 초록색으로 다양하게 표현한것에 놀라워했다.

건초마차, The Hay Wain

너무나 당연히 사실적이어서 당연히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것을 신선한 시각으로 보려는데는 힘겨운 투쟁이 녹아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컨스터블이 인정받는데까지 오래걸린것으로 보이는 이유로 보인다.

 

컨스터블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과학이다, 따라서 자연의 법칙에 대한 질문의 하나로서 추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풍경화 역시 자연철학의 한 갈래로서, 그림이란 자연철학의 실험을 위한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 않은가."

 

저자는 컨스터블이 말한 자연철학이란 오늘날의 물리학의 의미라고 말한다. 컨스터블의 그림은 입체파 화가나 중세미술가보다 훨씬 사실적이고 사진에 가까운데 그 의미를 깊게 들여다 봐야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컨스터블이 서있는 위치, 보는 색깔은 사실 컨스터블이 고전물리학처럼 수많은 구도와 색상조합의 실험을 거친 결과물이다. 그러한 사례가 <와이벤호 공원>이라는 작품안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와이벤호 공원, Wivenhoe Park

이러한 실험의 결과물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것을 저자는 말하고 싶은듯 하다. 사진작가가 놀라운 가을 단풍을 보여주어 우리를 놀라게 하려면 우리를 암실로 불러 스크린위에 영사를 할것이다. 그렇게 영사기의 전등에서 빌려온 빛과 우리눈의 빛의 순응력의 협조를 받아서만 그는 자신이 자연속에서 맛 본 빛의 강도와 비슷한 세계를 재현할 수 있을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대한 컨스터블의 의견이 존재한다.

 

1822년 프랑스에서 개발되어 1823년 런던에서 전시된 최초의 사진장치 디오라마(diorama)를 컨스터블은 위대한 환영이고 예술의 경계선 밖에 속한다고 한 편지해서 말했다. 그는 사진을 속임수라고 부르며 예술은 속임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깨워 줌으로서 즐겁게 해주는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두고 컨스터블이 오늘날 그 글을 썼다면 암시하다 라는 말을 사용했을것이라고 한다. 미술가는 햇빛이 비치는 잔디밭을 모사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암시해 줄 수는 있다. 저자가 말하는 유사성의 한계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컨스터블이 색의 조합에 대한 실험에 진심이었던 일화를 저자의 다른 저서 '서양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컨스터블과 그의 후원자였던 조지 보몽(George Beaumont)경에대한 일화인데, 조지경이 컨스터블에게 왜 그림의 전경에 그런 경우에 꼭 써야 할 오래 된 바이올린의 완숙한 갈색을 쓰지 않느냐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컨스터블은 바이올린 하나를 가져다 자기 앞의 풀밭 위에 놓음으로써 우리눈에 보이는대로의 신선한 초록빛과 관습적인 요구에 따른 따뜻한 색조와의 차이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솔즈베리 성당의 풍경,&nbsp;Salisbury Cathedral from the Bishop Grounds

저자는 솔즈베리 성당의 풍경을 보면 컨스터블이 색조의 농담을 조절함으로써 빛과 깊이의 인상을 표현하는데도 성공했다고 확신한다. 이렇듯 같은 초록색이라도 농담법으로 확연한 차이를 줄 수가 있다. 이런 그의 실험들은 처음엔 색조의 농담을 교란시키는것이라 여겨져서 많은 저항이 있었다. 일례로 컨스터블이 왕립미술원의 회원으로 전람회의 심사위원석에 있었을때 뭔가 착오로 그의 그림 한 점이 심사용 이젤 위에 올라왔는데 그의 동료 한 명이 성급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역겨운 초록색 물건을 치워버려".

 

컨스터블과 같은 혁신적 미술가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다시금 그의 편지에서 나타난다. 그의 풍경화 한 점을 사려는 선견지명 있는 어떤 고객이 '기인'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는 상심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미술품 감정가라니까 아마도 신선함과 아름다움보다는 오물과 때를 더 좋아할 텐데, 차라리 난 그 그림에 진흙과 검댕을 칠해 놓는 편이 낫지 않을까?" 컨스터블은 빛을 표현하는 데 부심하고 있었으니만큼, 오래 된 바니시로 덮인 어두컴컴한 그림을 보는데 익숙한 눈을 가진 일반 대중의 시각적 습관을 한탄하고 경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이라는것의 가치와 상호관계를 일깨워주는 움직임은 그가 죽고 난 후 프랑스에서 다시 살아났다.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의 <젊은 미술가에게 주는 충고>와 같은 전형적인 색조로 그려진 회화에서 급작스레 변화하는 명암의 색조는 햇빛을 '암시'해준다. 컨스터블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알려지는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창립자 중 하나인 장-프랑소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는 전통주의로부터 모더니즘의 전환을 이끌어낸 화가로 불리며 자연주의의 대가라고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이삭 줍는 여인들>은 당시 프랑스 정치계에서 큰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미술계에서는 밭에 쏟아지는 밝은빛과 여인들의 굽은 몸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의 조화를 잘 표현해낸것으로 유명하고 그의 작품들은 후에 인상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이삭 줍는 여인들, Des Glaneuses

Section 2.  진실과 전형, Truth and the Stereotype

저자는 85페이지 진실과 전형이라는 현 독일, 과거 프로이센 왕국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인용한다.

"우리들의 오성(지성)은 선험적 도식에 의해 이 현상세계와 연관을 갖는데,... 이것은 인간의 영혼 속에 너무도 깊이 숨겨져 있는 기술이어서, 자연이 어떤 비밀스런 조화를 부리는지 우리는 거의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이 인용구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은 유사성의 한계란 인간은 경험과 관습의 지배를 받는 존재란 이야기로 보인다. 경험과 관습은 전형으로 자리잡고 무엇을 그리거나 표현해도 이 전형의 영향을 받는것은 필연적이라고 말하는듯 하다.

 

독일의 삽화가 루트비히 리히터(Ludwig Richter)는 그의 자서전에서 하나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모두 로마에 거주하던 젊은 미술학도들이었을 1820년대에 유명한 절경 티볼리를 찾아가 그림을 그리려고 앉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한 무리의 프랑스 화가들이 와서는 운반해 온 엄청난 양의 그림물감을 거친 대필로 캔버스에 칠하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그 방법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자극을 받았는지 그들과 반대로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도 꼼곰히 그려내어 보이는것을 충실히 옮겨 그리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저녁 때 하룻동안의 노력의 결과를 비교해 보았을 때 그들이 그린 것들은 서로 놀랄 정도로 달랐다. 분위기, 색채, 심지어 모티프의 윤곽선까지도 한 사람 한 사람 달랐다. 그는 사람의 기질마다 다른 유형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는데 저자는 그의 설명을 두고 미술작품을 가리켜 '기질(temperament)을 통해서 바라본 자연의 한 모퉁이'라고 불렀던 에밀 졸라(Emile Zola)의 유명한 정의의 한 실례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한 시대의 미술가의 기질이나 개성, 선호 경향들을 묶어놓은 것들이 전형이 되어 진실을 왜곡한다. 전형은 상상력을 구체화 시켜준다91페이지에서 소개하는 같은 시대에서 로마의 산 탄젤로 성을 그린 작자 미상의 목판화와 펜과 잉크로 그린 또다른 작자 미상의 산 탄젤로 성 그림이 그러하다. 전자는 티베르 강이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했을 때의 엄청난 수해를 보도한 독일의 한 신문에 게제된 로마 풍경화이다. 실제 로마 산 탄젤로 성과는 매우 다른 모습인데 조잡하게 독일의 전형이 산 탄젤로 성의 모습위에 덮여진듯한 그림이다. 저자는 목판화를 고안해낸 사람이 로마를 정말로 보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하지만 전형이 가미된 모사라는점에서 이 조잡한 목판화를 좋아한다고 한다. 저자가 추측컨데 목판화를 고안해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전형들, 이를테면 목조로 되어 있고 물매가 가파른 독일의 축성도시를 골라냈을것이고 거기에 로마의 그 특정 건물에 속해있다고 자기가 알고 있는 일부 뚜렷한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전형을 특별한 기능에 맞게 번안해냈을것이라고 본다. 거기에 여러 추가적인 정보를 덧 붙여서 나온 그림이 이 목판화인 것이다.

 

로마 산 탄젤로 성 (좌) 목판화 (중) 펜과 잉크 (우) 사진

이러한 현상은 유명한 17세기 지형도 작가였던 마테우스 메리안(Matthäus Merian)의 파리 풍경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노트르담 성당을 표현하고 있는데 언뜻 보기에는 아주 잘 그렸다. 그러나 성당의 창, 첨탑등에서 17세기 사람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전형이 사실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매우 유사해서 만약 그 판화가 파리의 그 성당에 관한 현존하는 유일한 자료라면, 우리는 이 그림에 의해 대단한 오해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실례들을 통해서 증명하고 싶은것은 모든 재현이 다 부정확한 것이라던가 사진 이전의 시각적 기록물들이 모두 오해로 이끄는것이 아니라는것을 분명히 한다. 앞서 언급한 자료들은 신문이나 지형도라는 개개의 형태를 충실히 기록하려는 미술가들의 작업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특수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미리 존재하던 서식이나 공식이 작품속에서 나타난다는 말을 하고싶어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새로운것이 아니라고 한다. 3000년전 이집트 신왕국 시대 초기의 그림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석회암 부조로 그려진 <투트모세 3세가 시리아 원정에서 갖고 온 식물>을 당시 파라오가 가리켜 진실이라고 하지만 식물학자들은 이 그림들이 어떤 식물을 뜻하는 것인지 의견이 모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야기는 어떤 희귀한 종류의 동물이 유럽에 소개될 때마다 되풀이 된다. 코뿔소나 코끼리가 그러하다. 16세기 초에 뒤러에 의해 그려진 코뿔소는 피부가 갑옷처럼 여러겹으로 이루어져 있고 피부의 질감또한 파충류와 유사하게 표현했다. 이어 18세기 말에 그려진 히드의 판화에선 피부의 질감은 코뿔소의 그것과 비슷해 졌으나 피부가 갑옷처럼 여러겹인 부분은 그대로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진실과 전형의 서례는 아마 옛날 오 천원 권일것이다. 은행권 원판 기술이 없던 옛날 오 천원 권을 도입하려고 영국에 원판을 의뢰할 때 율 곡 이이의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율곡 이이의 표준 영정이 없어서 김정숙 조각가가 조각한 율곡의 동상을 사진으로 찍어 영국으로 보냈는데 동상은 누가봐도 한국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람이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전형이 덧 씌워진 율곡 이이가 그려졌고 해당 지폐는 이후 시중에 유통됐다. 이는 1977년 6월이 되어샤야 바뀌었다.

 

그러나 이후 김은호 화백에 의해 그려진 표준영정 또한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영정을 상상해낸것으로 이 또한 진실과 전형의 사례라 볼 수 있다. 저자는 정확하 초상화란 시각적 경험의 충실한 기록이 아니라 어떤 상호관련된 모델의 충실한 구성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표현의 형태란 그 표현의 목적, 그리고 기존의 시각언어가 통용되고 있는 그 사회의 요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것이라고 말하며 장을 마친다.